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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하기/여행

[충남/당진]신리성지 가보즈아앙아!!!!!

by 프로목욕러 2022.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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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성지

 

충남 당진에 위치한 신리 성지 혹시 가보셨나요??

 

저는 벌써 두 번째 방문이었어요!! 

 

처음에 코로나 시작 했을 때 갔다가. ㅠㅠ 

 

방문 거절 당했는데;;;;;; 너무너무 아쉬워서 다시 가봤어요!!

 

이번에는 구경 재대로 하고 왔습니다!!

 

물론 식당이 영업을 하지 않아 아쉽긴 하지만~~ㅋㅋ눈누 난나~

 

 

 

 

 

 

성 다블뤼 주교관 겸성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 외에도 미술관이 있었어요!!

 

진짜 이날 바람이 많이 불어 날은 추웠지만 하늘이 다했네요!!ㅋㅋ

 

코로나가 어서 끝나~~

 

수녀님들께서 운영하는 식당도 가보고 미술관, 성당 내부까지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이 용 안 내 * 

 

1. 내포지역의 유래

:내포는 신리성지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평야지대를 일컫는다. 원래 내포라는 지명은 "안쪽에 자리 잡은 갯가"를 뜻하는 우리말 "안 개"를 한자식으로 표현한 데서 유래했다. 바다가 육지 안으로 깊숙이 휘어 들어간 지역을 뜻하는 말로 처음에는 바닷물이 수로를 타고 내륙으로 들어와 육지와 만나는 지역을 가리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범위가 확대되었다. 조선시대에 이 일대 서해 바닷물이 들어오는 하천과 주변의 습지, 그리고 논으로 이루어진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서북쪽 일대 지역을 부르는 지명으로 이는 오늘날의 당진, 서산, 아산, 홍성, 청양 지역에 해당하며 넓게는 보령지역도 아우르고 있다. 

 

한국의 천주교 역사 속에서  "내포"는 보다 좁은 의미로 사용 되었으며, 초창기 프랑스 선교사들은 삽교천과 무한천에 접한 평야지역을 "내포평야"라고 불렀다, 충남 당진시의 신평면, 우강면, 합덕읍, 예산군의 고덕면, 신암면, 예산읍 일대가 여기에 속한다. 후기로 가면서 충청도 서부 전체를 포괄하는 상부 내포와 하부 내포로 지역이 확대되었지만 중심은 내포평야 일대였다. 

조선시대에 천주교의 성장에 중요한 역활을 했던 내포지역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곳은 서해 바다와 연결되는 평평한 습지로 구성되어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내포 지망은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땅이 개간된 지역이었다.

 

둘째, 수로와 바닷길, 그리고 육로가 발달되어 있어 외부와 교류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췄다. 이 길을 통해 외부의 새로운 물품은 물론 사상과 종교가 쉽게 유입될 수 있었다. 

 

셋째, 행정적으로는 월경지라는 특수한 체계를 갖고 있었으며, "월경지"는 중심 도시와 지리적으로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특수한 지역을 말하는데 오늘날에는 사라진 행정체계이다. 예를 들어 신리는 조선시대에 "홍주 신리"에 속해 있다. 당진시와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멀리 떨어진 홍주(홍성)에서 관할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신리성지

- 지리적 위치 : 충남 당진시 합덕읍에 속한 신리는 삽교천 상류에 위치한 마을이다. 지금은 평야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밀물 때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며, 신리의 인접마을인 거더리에는 나루가 있어 배로 외부와 왕래하기가 수월했다. 신리와 거더리는 합쳐서 신리로 불렸다. 1860년대의 기록에 의하면 신리 일대는 온통 습지였으며, 우물이 없어 주변에 흐르는 소금기 섞인 물을 마셨다고 전해 진다. 

고덕지역은 신리 앞을 지나는 삽교천의 상류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인데 별암, 높은 뫼, 한내 등 초기 교회 신자들이 거주하던 마을이 분포되어 있다. 더 상류로 올라가면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가 있는 덕산이 있다. 

- 신앙의 역사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세례를 받은 1784년 이후 신리에 천주교가 전해지게 된다. 이 시기 신리에 정착해 살고 있던 밀양 손 씨 집안을 중심으로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66년 무렵에는 마을 사람 400여 명 전체가 신자로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성장한다. 신리는 바닷길을 통해 외부와 접촉하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내포의 교우촌들과 쉽게 연결된다는 이점이 있었기에 조선 천주교회의 중요한 거점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1865년부터 신리에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거주했으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입국하는 통로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신리의 첫 순교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안드레아)입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자선(토마스) 성인이 공주에서 순교한 이후 서울, 수원, 홍주, 해미, 보령 갈매못 등에서 40명이 순교의 길을 떠났다. 이는 이름이 밝혀진 내포지역 순교자들 중 10%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신리의 신자 가운데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도 많았는데, 인근 대전리 공동묘지에 위치한 46기의 무명 순교자 묘지가 이를 증명한다.  

 

3. 이 용 금 액 

: 무  료

 

4. 주          소

: 충남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

 

5. 연    라   처

: 041- 363-1359

 

6. 이 용 제 한

: 전 지역 금연, 드론 촬영 금지, 음식물 반입 금지, 놀이기구 반입금지(자전거 등), 쓰레기 투기 금지, 애완동물 반입금지, 애정행위 금지

 

7. 비          고

- 주차장 무료

- 현재 미사 없음

- 식당 미 운영 (추후 변경 예정)

- 홈페이지: http://sinri.or.kr/

 

 

별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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